여행 이야기/2015 가을 필리핀 (바기오-클락)

2015년 가을, 필리핀 바기오 여행 이야기 05 (태풍후의 일상..아프면 서럽다..)

트레비앙 2016. 9. 10. 21:29

지나갈 것 같지 않던 태풍 란도가 바기오를 휩쓸고 간 이후..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하루가 올 것만 같았다. 사실 한국에 살면서 이런 자연재해를 몸소 느끼지 못했던 터라, '이 비만, 이 정전만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겠지' 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 이었을까.?

 

 

(번햄파크: 태풍 란도에 쓰러진 나무사진출처: 구글이미지)

 

태풍이 바기오를 강타하는 시기에 수면바지와 긴팔 그리고 후드 자켓까지 매일 입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바기오의 한기를 충분히 막을 수는 없었나 보다. 게다가 정전으로 인해서 찬물로 샤워를 이틀이나 했었으니..그 전에 감기에 걸리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

 

그렇게 나는 4년만에 최악의 감기(기침이 너무 심해 폐렴인줄..)를 맞이하게 된다.

 

기관지가 약한 편이라서 환절기에 가끔 목이 붓곤 한다. 기침이 오기도 하고..하지만 이번에 겪은 감기는 달랐다. 진짜 토하기 직전까지 기침을 해댔고, 그 어떤 약을 먹어도 낫지가 않았다. 펄펄 끓는 열과 두통은 기본이고이러다가 정말 한국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

 

친구가 의료계에 종사했던 터라, 그나마 초기에 적절한 약을 쓸 수 있었고 약국에 가서 성분명을 보여주며 약을 구할 수 있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얇은 옷을 입고 다닐 때 나는 한기 때문에 두꺼운 후드 자켓을 벗을 수가 없었다.

 

 

(캠프 6 지역 산사태..도로 곳곳에 산사태로 인해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사진: 구글 이미지)

 

더욱 속상한 것은..태풍 이후 도시의 상황..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도로에 나무들이 쓰러져있었고, 산사태로 길은 유실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오가지도 못하게 고립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지난 주에 일을 어서 마치고 아신 온천에 지프니를 빌려서 놀러 가자고 했던 그 말은 정말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온천에 가서 내 몸 안에 들어있는 한기를 쫓으려고 했던 나의 생각은 허무한 꿈일 수밖에.. 게다가 여기저기 복구중인지라 어디 놀러 갈 곳도 없었다.

 

 

(태풍 지나가고 몇 일 후 번햄파크 상황..쓰러진 나무들..)

 

심지어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번햄파크 마저도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있고 온갖 잔해들로 갈 곳이 되지 못했다.

 

 

(번햄파크 놀이터의 다른 방향..안전이유로 어린이들 몇몇 놀이터 시설 이용이 불가..)

 

이도 저도 못하면 마사지라도 받지 뭐, 했지만..

태풍 때문에 마사지하는 분들도 출근을 못하고 있는 상태….

진짜 젠장 맞을 상황….

 

 

(맑개 갠 마인즈 뷰의 하늘이 참 낯설면서도 예뻤다..몸이 아파 즐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꾸역꾸역 어디라도 나가보자며 갔던 마인즈 뷰,

하필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떨어져서 폐렴환자처럼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게 참 슬펐다. 그래도 한바탕 비가 지나가고 난 뒤여서 그런지 하늘은 참 맑았고 신록은 더 푸르렀다

 

집에 갈 날이 대략 일주일정도 남아있었는데,

몸도 아프고 길도 다 막혔겠다할 일이 없었다. 숙소 안에서만 있자니 갑갑하고, 뭔가 건물 안에서 계속 있다가는 내 몸에 한기가 들 거 같아서 광합성이나 좀 하자 싶어 SM으로 나갔다. 집에 가져갈 선물이라도 사볼까 싶어서..

 

 

(SM바기오는 단 1층만 영업하고 있었다..그나마도 반쪽만…)

 

SM 뚜껑이 날아갔다는 소식은 이미 페북에서 접했었는데,

내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비로 인한 피해를 입은 상점은 당연히 문을 열지 못한다는 것. 참 사람이란 게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이 당연한 상식조차 생각해 낼 수 없다니

 

먼저 이민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앞으로 정전이 또 있으면 여러모로 고생하니 제네레이터를 알아보는 게 어떻냐고 이야기를 하고, 알아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대화를 들어보니 아직도 전기가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전기발전기를 급하게 구매하러 온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시내 중심에 머물고 있던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뚜껑만 날아간 줄 알았더니 간판도 전부 다 날아갔었던 SM..)

 

그렇게 허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감기가 조금 나아지면서 따뜻한 바람과 햇살이라도 받고 와야지 싶어서 번햄파크로 나갔었다. 많이 복구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무는 뒹굴고 있었고, 아이들 놀이터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시내 중심에 있던 공원이라 회복속도가 꽤나 빨라서 몇 일 뒤에는 불편함 없이 아침마다 조깅을 즐길 수 있었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재해에 대한 안전불감증 같은 것이 있었던 나에게 태풍 란도는 아주 많은 교훈을 주었다. 먼저 휴가를 갈 때 태풍소식이 있어도, “몇 일 비가 오다가 말겠지..그러면 맑아지는데 뭐..”라고 했던 생각을 싹 다 뜯어고칠 수 있었고, 휴대폰 배터리는 되도록 100% 그리고 외장배터리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게 되었다. 또한 재해에 대한 기사를 보면 더욱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그렇게 거칠게 태풍을 맞이하고 나서 몸이 회복되자, 보상심리를 반영하듯 바기오 일대를 더 열심히 휘젓고 다니게 되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