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2015 가을 필리핀 (바기오-클락)

2015년 가을, 필리핀 바기오 여행 이야기 03 (태풍에서 살아남기 1편)

트레비앙 2016. 9. 4. 16:09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고 살고 있다.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어서 마치 애초에 그러했던 것처럼 느끼는 과학기술..그로인한 생활의 편리함..

 

사람은 이 모든 과학의 발달로 인한 생활의 편리함을 당연하게 느끼기도 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런 안일한 생각이 뇌를 지배할 즈음자연은 우리에게 한번씩 자극을 주기도(라고 쓰고 엿을 먹여준다고 읽는다.) 한다.

 

2015년 가을, 필리핀 바기오에서 느꼈던 대자연의 위대함(태풍의 습격)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도착하고 며칠 뒤부터 비구름의 빈도가 높아졌었다바보같이 비온 뒤 풍경은 멋있구나..했었지…)


보통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것은 바로 날씨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랬었다. 서늘한 필리핀이라고 해서 조금 신기하기도 했는데, 가장 좋았던 소식은 바로 우기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잠시 태국에 거주하던 시절, 동남아의 우기가 얼마나 기운 빠지게 하는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터라,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처럼 청량한 고산지대의 날씨라니..내심 기대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은 내편이 아니었던 걸까.. 안일하게 문명에 취해 살아온 나를 반성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지 내가 필리핀 바기오에 방문할 당시, 그 이름도 아름다운 란도라는 태풍을 내려주시게 된다.


 

(태풍 란도의 이동 경로필리핀 북부를 재대로 강타했다..출처: 구글이미지)

 

사실 태풍이 올라온다더라..라는 사실을 나는 크게 실감하고 있지 않았다. 몇일 비가 많이 내리겠구나..정도..대부분의 내 인생의 80%를 서울에서 살았고, 아파트에 주로 살아서인지, 물난리 라던지 태풍이 온다 해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고 살지 않았었다. 심지어 태국 사상 최악의 홍수라고 했던 2011년에는 방콕에 거주 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 집 근처는 물에 잠기지 않았고, 내가 다니던 회사지역도 침수가 되지 않았었다. 조금 불편했던 것은 놀러 가는 것과 시장 보는 정도랄까..

 

어찌 보면 나는 재해불감증을 가지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연을 만만하게 봤다던가자연이 우리를 덮치더라도 크게 도시의 일상에는 지장이 없지... 이 정도의 마인드였달까..

 

하지만 이런 나의 자신감을 한번에 꺾어주는 복병이 있었으니…그 시작은 정전이었다.

첫 정전은.. 10 19일 아침에 일어났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전자제품이 꺼지는 소리를 들었고, 대략 30-1시간 뒤에 다시 불이 들어오길래, 아 뭐 비가 많이 와서 두꺼비집이 내려갔나? 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고생의 전조가 될 줄이야


보통 휴대폰 충전을 100% 해놓고 지내는 나이지만, 일 때문에 주로 숙소 안에 있다 보니 크게 충전에 대한 급박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었고, 인터넷 접속 시 잠시 사용하는 수준이었던 데다가 인터넷도 느린 편이라서 그냥 현지에서의 일상에 젖어 들고 있었던 상태. 또 정전은 태국에서 자주 접해봤던 터라 사실 동요되지 않았고, 보조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았던 내 자신의 준비성을 타박하는 정도.. 


(2015년 10월 19일 카톡 프로필클라이언트에게 연락 올 일이 있어 임시로 남겨둔 메시지였는데..)


그렇게 1차 정전이 오고 난 뒤…2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불길한 예감과 함께 다시 2차 정전이 찾아오고 만다. 그렇게 나는 3일간 숙소 건물에서 전기의 숨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그리고 전기 동냥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전기가 우리 곁을 떠났던 첫 날, 그래도 그날 밤은 수학여행 가서 몰래 밤에 수다 떨던 그런 기분으로 그래도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다.

 

전기 없이 맞이한 10 20, 숙소 건물에 거주 중인 다른 분들은 미리 충전해둔 휴대폰 + 배터리로 연명하며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오전에 바로 들은 소식은, 태풍의 경로 때문에 더 심한 비가 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붕괴 소식산간지방이라 그런지 도로가 침수되거나 돌로 막혀서 다른 지역은 고립되었다는 소식도 있었고… 

 

갑자기 전기(라고 쓰고 휴대폰 배터리라고 읽음)에 대한 불안함이 엄습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멀티탭과 충전기를 챙겨 들고 스타벅스로 향하게 되었다. 도착한 첫날 갔던 잔헤이에 있는 스타벅스는 갈 수가 없는 상황…(잔헤이가 산길이라 차량 진입이 제한된 상태였던 걸로 기억), 가까운 세션로드에 있는 스타벅스를 방문하게 되는데..이미 충전이 가능한 자리는 만석, 심지어 좌석도 없는 상태였다.


(잠시동안 행복을 맛보게 해준 Patch Café.)


차선으로 선택한 곳은, Patch Cafe. 이때까지만 해도 일행들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던가우리에겐 다행히 현지거주인의 정보력과 자본력(커피를 자유롭게 사서 마실 수 있는…..)을 가졌으니..

 

(멀티탭이 없었다면 많이 슬펐을지도 몰라..우리는 전자제품의 노예니까..)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했던 일은 바로 전기를 쓸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

먼저, 카페에서 전기 충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렇다. 필리핀은 정전이 잦은 편인데, 영업장의 경우 비상사태를 위해서 전기 발전기를 구비하고 있는 경우가 잦다. 특히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의 경우(호텔, 카페 등등) 더 그런 것 같다. 예를 들면,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던 건물은 전체가 정전상태인데 스타벅스 내부는 전기가 들어오는 상태였던 것. 그래서 우리는 충전을 위한 핫플레이스를 찾을 때 카페를 1순위에 두었던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야 발견한 사실, 우리 숙소 코너에 바로 호텔이 있었고 그 호텔 1층에는 커피숍이 있었는데왜 애초에 거기로 갈 생각은 못했을까….)


(음료수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커피가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전자제품+멀티탭을 들고 카페에 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그래도 좌석의 여유가 있었지만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전기 충전이 가능한 장소는 모두 만석이 되었었으니이때가 대학교 중간고사 기간 즈음이어서인지 노트북 충전을 하러 온 청년들이 참 많았었다그래..우리 선조들은 촛불 밑에서도 그리고 달빛 아래서도 공부를 했으니..젊은이들 힘내게나……라고 생각했다.

 

충전을 여유롭게 마치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께 연락도 하고….하루 동안 못했던 검색도 하고 그렇게 여유롭게 지내던 어느 순간누가 충전만 되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고 했던가.


(그래..인터넷 정도는 두절되어야지..태풍이지..)


정전 이후….또 다른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그것은 인터넷두절.

인터넷을 보급하는 외부의 기기 무언가가 번개 공격을 받았던 것그래서 모두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3G 불통 + 와이파이 사라짐..) 그리고 숙소 앞 건너편에 서있던 전봇대도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오 예………………….

 

이후, 인터넷 기능마저 타의로 인해 마비된 나의 휴대폰은전기 없는 건물 내에서 어둠 속에 계단에 오갈 때 훌륭하게 손전등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참 비싼 손전등이었다……


(얼마나….로맨틱한가….촛불 놓인 식탁에서 먹는 삼계탕 한 그릇의 우아함이란…..)


그리고 태풍으로 인한 정전의 장기화가 기정사실이 되어가면서, 첫날 여유롭게 사용하던 충전식 램프의 사용도 최대한 절전모드로 들어가게 되고, 우리는 촛불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식사시간에도 그렇고, 어둠이 드리워진 건물 안에는 애인에게도 못 받아봤던 촛불 길이 나있었다……그래..로맨틱하다고 생각해야지….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밖에….

 

정전 + 인터넷 두절로도 현기증 나게 피곤했지만……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었다그건 바로…..뜨거운 물의 부재따뜻한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는..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태풍에서 살아남기 2편으로 바로가기.)